빛 가운데 행하라
요한1서1:1-10
신앙은 차가운 교리나 머릿속의 관념이 아닙니다.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은 육체를 부정하고 영혼에만 무게를 두는 이원론에 빠져, 예수님의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과 육체의 부활도 부인했습니다. 기독교는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고 몸으로 부활함을 믿는 종교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그가 전한 예수는 추상적인 신화나 철학적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3년 동안 그분의 숨결을 느꼈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의 옆구리를 만져본 증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였습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Koinonia)'는 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도리를 지키거나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도덕적 의무나 도리로 오해하곤 합니다. 복음은 사건이며, 체험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건'과 '관계'에 있습니다. 유월절 사건이 있었기에 유월절을 지키듯,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기에 우리는 주일(Lord's Day)을 지키며 예배합니다.
예수를 단순히 머리로 생각만 하는 것은 종교에 불과하지만,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 신앙이 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생명이 연결되어 흐르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과 사귀는 삶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연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셨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내 안에 거하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죽은 나무가 아닌 생명의 나무이신 주님께 접붙임 되어, 그분의 생명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사귐입니다. 생명의 사귐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3절)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지속적인 사귐을 가질 수 있을까?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둠과 결코 공존하실 수 없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물러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여전히 어둠(죄) 가운데 행한다면,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완벽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가?" 해답은 '완벽주의'가 아니라 정직함입니다. 죄를 감추고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교만입니다. 반면,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과 깊은 사귐을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9절) 어둠 속에 숨어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종교적인 형식 뒤에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빛이신 주님 앞에 나오시면 됩니다. 사귐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귐을 누리기
요즘은 사람을 사귀어도 누림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을 만나서 섞이는 것 보다는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교회안에서도 만나고, 배우는 것은 많은데 진정한 사귐이나 나눔은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받은 말씀의 은혜와 일주일간 경험한 삶의 간증을 나누는 영적 사귐과 나눔이 절실히 필요하다. 주님안에서 사귐이 이루어질 때에 우라안에 기쁨이 충만해진다. 혹시 자랑이 될까봐, 혹은 부끄러워서,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닫고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결국은 교회는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는 단체가 되고 말 것이다.
-오늘아침-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